[한겨레S] 신지은의 옛 문화재를 보러 간 ‘경기사대부의 삶과 격, 숫돌’ 특별전
[한겨레S] 신지은의 옛 문화재를 보러 간 ‘경기사대부의 삶과 격, 숫돌’ 특별전
백자철화의 이 종린(이·죠은링)고인돌 1633년(인조 11년), 경기도 문화재 자료 136호, 경기도 박물관 소장(전주 이 씨 덕양군파 위탁). 신·지은이 제공”경기 사대부의 삶과 주자인 고인돌”특별전(3월 26일까지)는 경기도에서 출토된 고인돌 700점을 통해서 경기도에 살던 조선 시대 사대부들의 이야기를 선 보이는 특별전이다. 고인돌은 무덤 속에 내장 통지판이다. 사망자의 정보와 무덤의 위치 등이 집필되어 훗날 비석과 분구가 사라져도 누구의 무덤인지 알게 한다. 고려 시대에는 귀족 사이에서만 사용된 고인돌이 대유행한 것은 조선 건국 후의 장례 풍습도 불교식으로 유교식으로 바뀌면서부터다.조선은 법전인 『 경국대전 』과 『 나라 만들자 다섯 예의 』에 고인돌을 만들어 메우는 방법을 자세히 정하고 있다. 계층에 의해서 지석의 재질까지 앞섰다. 왕실 직계 자손만이 오석과 대리석 등 최고급 석재를 쓴 숫돌을 만들고 사대부가는 백자의 숫돌을 사용했다. 그만큼 고인돌이 조선 지배층의 장례 문화에서 중요시된 것으로 나타났다.세세한 배경 숫돌에는 최근 이력서 이상으로 상세한 개인 정보가 담긴. 『 주자 노래 예 』을 토대로 만든 『 나라 만들자 다섯 예의 』에 의하면, 숫돌은 2장 이상 만들어야 한다. 한장은 누구의 무덤인지만 간단히 쓴 표지 성격의 커버다. 그 시모이타에는 무덤 주인의 이름, 글씨, 생년월일과 몰년 세월, 태어난 곳과 매몰된 곳, 관직 경력, 아버지의 이름과 관직, 어머니 집과 봉호, 부인과 장인의 이름, 아들이 있으면 이름과 관직, 딸이 있으면 사위의 이름도 새기다.이처럼 숫돌에 들어간 항목은 성리학 사회가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여실히 나타내고 있다. 부모가 누구인지 아이는 누구인가, 배우자가 누구인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나타내고 있다. 생전에도 사후에도 사람들은 개인이 아니라 가문의 일부로 기억됐다.전시 1부 가운데에는 1456년에 제작된 싱닝부대 부인의 고인돌(보물)약 10년 후 1467년에 만들어진 황 수신의 고인돌(경기도 유형 문화재)이 진열되어 있다. 오늘 전하고 있는 조선 청화 백자 중 가장 빠른 예로, 조선 초기부터 정화 안료를 수입하고 뛰어난 백자를 만드는 중요한 자료이다.이상하게도 흥녕부 대부인은 몰라도 세조 임금의 장모 하면 누구인지 알려진 것 같다는 것이다. 팬·스 싱이라는 이름을 몰라도, 팬·히 존슨의 셋째는 알 것 같애. 어떤 사람인지 아니라 왠지 굉장히 집안 사람? 그것을 알것만으로도 한 사람을 “충분히 알고 있다” 같다고 생각하는 것, 배경에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과연 옛 무덤 속 일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도 좋다. 전시 중인 수백년 전 사람들의 이야기가 갑자기 이 시대적 감각에 다시 보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황희 정승의 아들 황 히데 노부(팬·스싱)의 청화 백자 숫돌(1467년 경기도 유형 문화재). 신·지 은 여러 공국이 허락한 편법,”사번”오늘 상주에게 비싼 장례 용품을 권하는 것은 기업의 마케팅지만 조선 시대에는 장사 속에서는 없는 지배 이념이 그 역할을 했다. 조상의 장례를 치를 때 가장 좋은 물건을 사용할 후손의 도리와 효심을 다하게 됐다. 그렇다면 조선 시대에 가장 좋은 백자를 손에 넣지 못한 곳은 어디였을까. 바로 왕실이었다. 양반들은 왕실용 백자를 만드는 경기도 광주의 관요에 개인 주문을 넣는 방식으로 숫돌을 맞춤하게 됐다. 이렇게 관용 가마에서 사적으로 자신을 굽기를 저번으로 알려졌다.전시 2부에는 경기도 광주 조선 시대 가마터가 소개되고 있다. 우시리, 시게루리,무갑지방리 등 왕실 용의 백자를 생산하던 관아가 지나 가는 곳마다 사대부가의 고인돌의 파편이 출토되었다. 현종 14년(1673)에 관아의 장인으로 고인돌비를 보냈다고 기록했다”조 세환 일기”등의 문헌도 전한다.관아는 왕실 관청인 사옹원이 운영하는 가마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재료나 연료, 노동력 함께 국가의 자산이었다. 사번은 이를 유용 하는 잘못이어서 조선 왕실도 표면적으로는 사번 규제를 유지했다. 그러나 잘못을 저지르고도 그 잘못이 유교적 예법과 효도를 실천하고자 하는 기다란 명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눈을 감기도 했다. 다만 일반 국민이 아니라 국가 운영의 핵심이었던 사대부만 할 수 있는 특수한 잘못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실수와 용서를 구하자마자 교환하는 “그들이 사는 세상”였던 셈이다.전시 3부에서는 경기 지역 가문 5곳에서 건너온 유품과 고인돌을 소개한다. 가문을 빛내고 책임을 지게에 몰두한 치열한 흔적 사이에 언뜻 비치는 끝없는 인간의 마음이 있다. 지금 눈에도 그 빛을 사로잡기는 어렵지 않다. 죽음을 앞두고 전면에 내세운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다양한 슬픔의 색은 “경기 사대부”라는 문자를 넘어 관람객의 마음에 스며들다.
백자 다종화 이 동원(이·죠은필)숫돌과 숫돌을 넣은 백자 지석 아이, 1871년 이후 경기도 박물관 소장(고성 이 씨 창원 주 공파 위탁). 신·지은이 제공 숫돌은 땅에 묻기 위해서 만든 것이지만, 더러워지고 손상되는 일을 막기 위해서 보호 케이스를 쓰기도 했다. 이 동원(이·죠은필, 1803~1871)의 무덤에서는 고인돌 7장과 함께 큰 고인돌이 출토되었다. 청화 백자에서 만든 지석의 뿔을 부드럽게 잡고 숫돌 상자 안에는 무덤과 선산부를 지키는 사람들의 이름까지 쓰고 있다. 당시 옛 사람들이 추구했던 후한 것을 이해시키는 것은 경전의 구절과 압도적인 에피소드들이 아니라, 그 빈틈없이 꼼꼼한 제조 법이다.1706년에 사망한 안동 권 씨의 고인돌은 그의 아버지 권·팬(1636~1716)이 썼다. 마지막 장에는 쓰여진 시에는 딸을 먼저 보낸 답답한 슬픔이 나타나고 있다. “너도 울고 나도 우니깐 내가 죽을 때는 누가 운담. 귓가에는 목소리가 예쁜 모습이 눈에 떠오르는 것에 영원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날 수 있는지”
백자 청화 안동권씨(부인 심수근) 고인돌, 1730년(영조 6년) 청송심씨사평공파가 경기도박물관에 기증했다. 신지애 제사위원회의 요청으로 간신히 한두 자 써내려간 슬픔은 커다란 백자 항아리에 담겨 땅에 묻혔다. 권환은 이후 10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뒤 후세의 우리가 그 슬픔을 꺼내 읽는다. 울어줄 사람을 먼저 보낸 수많은 슬픔을 떠올리며 먼 옛날 죽음을 함께 애도한다. ‘그들이 사는 세상’이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 이야기로 다시 만나는 순간이다. 좁힐 수 없는 어려운 옛날 이야기에 발을 내딛고 손을 내미는 것은 언제나 마음의 일임을 일깨워주는 전시다.문화재 칼럼니스트